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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고 그리며/이야기꾼 이야기

『네 하늘은 무슨 색이야?』#1~10



#1
"안녕? 한 가지 물어봐도 돼?"
처음 보는 여자애가 얼굴을 들이대며 말을 걸어왔다. 이게 말로만 듣던 헌팅인가? 처음 겪는 일에 당황하여, 대답도 못 하고 빤히 바라만 보고 있다. 얼굴이 너무 가깝다. 화려한 분홍색 생머리에, 입술도 분홍색이다. 아참. 눈도 분홍색이다. 분홍색 눈동자의 중심에 까만 점을 찍어놓은 것 같다.
"대부분의 시간에 하늘이 파란색인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줘."

#2
도서관에 칼 세이건 의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을 되돌려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방학이 시작되면서 지루한 장마가 끝나고 날이 꽤 더워졌다. 더위를 핑계로 집에서 내내 책이나 읽으며 빈둥대다가, 반납 독촉문자를 3번이나 받고서야 도서관에 책을 돌려주었다. 눈에 들어온 책들은 많았다. 칼 세이건 의 『혜성』,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 스티븐 호킹의 『위대한 설계』등의 우주과학 서적들과 몇몇 문학들. 특히 조지 오웰의『1984』를 읽다 말았었는데, 우연히 눈에 띈 것이었다. 갑자기 결말이 궁금해졌지만 반납기일이 늦은 탓에 3일간 책을 빌릴 수 없어 그냥 나와 버렸다. 멍 하니, 더운 날씨에 불평을 하며 집을 향해 멍청하게 걸어갔다.

#3
나이는 17세 정도나 되었을까? 이런 옷차림은 옛 미국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나 봤던 것 같다. 하늘하늘한 연 분홍빛의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에, 하늘색의 카디건을 하나 걸치고 있다. 요즘 애들이 이런 옷을 입었던가? 복고가 다시 유행하는 걸까. 그 왜, 미니스커트가 유행하는 주기에 대한 이론도 있지 않았던가. 결론은 22년 주기였던가. 그 내용에 대해 처음 읽었을 땐 별 쓸모없는 게 다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22년 주기라니.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뭐였더라.

#4
"얘, 괜찮아?"
두 번이나 거듭해서 물어봤지만 대답하지 않자 진심으로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되물어온다. 여자애와 별로 교류가 없어서 얼굴을 마주보기 힘들어하는데, 이때만큼은 뭔가에 홀린 듯 말도 못 하고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물론 특별히 아픈곳은 없다. 그럼 괜찮은가, 하면 그 또한 아니지만.
"얘, 괜찮아?"
"아, 아니, 괜찮아요. 그런데 무슨 일이신가요?"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을 했다. 난 당황할 때면 사무적인 말투를 쓰는 버릇이 있다.

#5
요약하자면 이렇다. 대기의 성분이라던가, 지구와 태양과의 거리라던가, 대륙과 대양의 분포, 생명의 종류와 분포, 그리고 왜 하늘이 파란가에 대한 것 등. 이 행성에 대한 물리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이미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더 알고 싶은 것은 우리가 파란 하늘에 대해, 그리고 지구의 모습과 우리 사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녀가 태어나서 자란곳은 하늘이 파란색이 아닌, 분홍색이라고 한다.

#6
그래서, 하늘은 왜 파랗더라? 그래. 레일리 산란이었지. 아니, 이건 멍청한 설명이다. '빛은 산란한다.'라는 지식만으로는 우리의 하늘이 파랗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내 생각에는 이건 단순한 우연이다. 하필 우리가 사는 행성의 대기가 햇빛을 파란색이 우리 눈에 잘 들어오도록 산란시키기 때문이다. 조금만 다르면 빨주노초파남보, 빛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색의 하늘이 가능하다. 대기의 밀도가 다르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다.

#7
'하늘이 파란 행성.'
그녀는 지구를 우리가 흔히 말하는 '푸른 행성 지구'가 아니라, '하늘이 파란 행성, 지구'라고 불렀다.
사실 행성 지구의 위성사진을 보면 푸른 바다보다는 하얀 구름이 더 눈에 띈다. 갈색의 땅과 초록의 숲도 보인다. 대양은, 물론 넓긴 하지만, 지구의 일부에 불과했다. 대기권 너머 우주까지 나가서 찍은 사진을 보았을 때 행성 지구는 정말로 아름답던가? 좀 지저분한 구슬처럼 보이지는 않은가? 오히려 얀 베르트랑의 사진들과 같이 대기권 안에서 내려다본 지구는 정말로 아름답다.
천정이 막혀있지만 않다면, 지구 어디에서든지 고개를 들어보면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시간에.

#8
"응. 하늘이 파란 행성은 처음이야. 정말 예쁘다고 생각해."
"그럼 다른 곳에도 가봤어?"
별을 건너온 여행자. 아니, 이 경우엔 여행자라기 보단 탐험가나 탐구자라고 해야 할까. 먼 거리를 여행해온 외계의 '행성 탐구자'라고 주장하는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내가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천문학 지식이 엄청났다. 순순히 그녀가 외계인이라고 믿었냐고? 물론 처음엔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고, 참 거짓을 따질 정도로 성의 있게 이야기를 듣지도 않았다. 다만 그 눈동자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그리고 뒤이어 말하는 이야기들이 너무 새로운 내용들이어서 더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물론이야. 하늘이 오렌지색인 행성에 가봤어. 아쉽게도 그곳의 사람들과는 이야기를 나눠보진 못했지만. 참, 그들도 우리와 비슷하게 생겼어. 어느 행성에서든 사람들은 다 비슷하게 생겼을지도 모르겠어."
"그거 참 신기하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외계인과 말을 놓고 있었다.

#9
그 자리에 서서 대화를 하다가, 앉아서 좀 더 오래 대화하고 싶어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카페를 향해 가려다가 언제나 대화를 위해 카페로 갔을 때 마다 시끄럽다고 불평한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안타깝게도, 이 주변에는 공원도 없었고 아는 조용한 가게도 없었다. 그래. 조용한 가게에 가려는 이유가 '떠들기 위해서'인데, 조용했던 가게가 언제까지나 조용할리도 없지.
스마트폰의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삭막한 땅 같으니라고.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더니 멀찍이 서 있는 도서관이 눈에 들어온다.
"아…."
그 순간, 머릿속에 일러스트 하나가 떠올랐다. 계단으로 된 산이 있는데 물고기가 첫 번째 계단을 밟고 올라가고 있고, 한 층 높은 두 번째 계단은 원숭이가 오르고 있었다. 또 한층 올라가는 세 번째 계단에는 아인슈타인처럼 보이는 캐릭터가 칠판에 E=mc^2를 쓰고 있고, 네 번째 계단은 높이가 뚝 떨어져서, 물고기와 원숭이의 중간쯤 되는 높이에서 웬 뚱보가 감자 칩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었다. 그 일러스트의 제목은…기억나지 않는다.

#10
"아니, 그럴 리가. 우리도 너희와 마찬가지로 자연 하늘색 머리는, 그러니까 자연 분홍색 머리는 없어. 염색한 거야."
도서관으로 돌아가며 머리색에 대해 물어보았다. 다른 행성을 탐사할 정도의 기술력을 가진 문명은 염색도 철저하구나. 윤기 나는 자연스러운 머리 결이라 당연히 자연모발일거라고 생각했다. 가끔 뮤직비디오 같은 곳에서 분홍색 가발을 쓰고 나오는 것은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분홍색 머리를 하고 다니는 사람을 본 사람 있나? 힙합을 좋아하는 친구에게서 미국의 모 여성 랩퍼가 분홍색 머리로 염색을 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것 같다. 물론 먼 곳의 이야기다.
물론 우리도 자연 하늘색, 그러니까 청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인간은 없다. 가끔 고전 문학에서 머리색을 푸른색이라고 묘사하는 부분도 보이지만. 예컨대 심청전 판소리에서 '난초같이 푸른 머리 두 귀 눌러 고이 땋고-' 어쩌고 하는 내용에서. 물론 그 내용을 보고 심청이의 머리카락이 파란색이라고 읽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너희 지구 인간들은 자연 붉은 머리를 한 사람들도 있더라? 우리는 파란 머리는 있어도 붉은 머리는 없거든. 정말 부러워."


주1) #9에 언급된 일러스트는 Sidney Harris의 작품(1999년)
주2) #10에 언급된 여성 랩퍼는 Nicki Minaj

ps.
사컷만화같은 소설을 써보고 싶어졌어요. 플롯은 따로 정리하지 않았어요. 결말도 생각해두지 않았습니다. 떠오르는 대로. 그냥.
ps2. 12.01.09 오타 및 맞춤법 수정. #10까지 추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