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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고 그리며/이야기꾼 이야기

『네 하늘은 무슨 색이야?』 #11~15


#11
도서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 뒤로는 약속이라도 한 듯 둘 다 한 마디 말이 없다. 새삼스럽게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쓸데없는 망상이 떠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다시 한 번 녀석의 질문을 되새겨 보았다.
하늘이 파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알까보냐. 생각해 본 적 없다. 하늘은 파랗구나 ― 하고 생각했다. 실제로 하늘에선 붉고 푸른 다양한 색을 볼 수 있지만 그래도 하늘은 파랗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했다기 보단 받아들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책 들이 선생님들이 '파란 하늘은 아름다워요'라고 말 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옛 조선의 이항복은 천자문의 첫 글자인 천지현황(天地玄黃)을 보고 '하늘은 아무리 봐도 파란데, 하늘을 검다고 하니 이상하다. 이런 거짓을 말하는 책을 공부할 수 없다.' 라고 했다던가. 천지현황. 하늘은 위에 있으니 그 빛이 검고 그윽하며, 땅은 아래 있으니 그 빛이 누르다. 하늘이 검다..?
하늘은 아무리 봐도 파랗다는 것은 관찰력의 부족이다. 파랗기도 하고, 붉기도 하다. 때로는 노란 하늘도 볼 수 있다. 구름에 의해 하늘은 하얗거나 검게 보이기도 한다. 그 색들을 한데 다 섞어버리면 하늘은 검다는 이야기가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12
"꺄아아아아!"
별안간 고양이가 나타났다. 소녀는 기겁하여 소년의 등 뒤에 숨는다. 고양이는 빤히 바라보더니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제 갈 길을 가버렸다.
"방금, 고..고양이?!"
얼굴이 새 하얗게 변해서 겁먹은 목소리로 묻는다.
"고양이 싫어해?"
"고양잇과 생물들은 위험하다고 들었어. 어째서 고양이가 이런 곳을 돌아다니는 거야?"
이네들의 지구 생물에 대한 조사가 완벽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고양잇과 생물. 물론 고양이를 포함하여 사자, 표범, 치타, 호랑이 등이 이 동물 군에 속한다. 이 생물군의 특징은 다른 동물을 잡아먹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기 위한 부드러운 근육과, 사냥감에게 상처를 입히기 위한 예리한 이와 발톱을 가졌다는 점이다.
고양잇과 생물들은 모두 육식동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진 않지만, 물론 집고양이들도 마찬가지다. 몇몇 집 고양이들은 잡식동물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이야기들이 있지만, 아무튼 육식동물이다.
위와 같은 설명을 하며 고양이의 위험성에 대해 주장하는 그녀에게 길 고양이들이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다는 점을 이해 시기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이해시킬 수는 없었고, 만일 고양이가 공격해 온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준다고 약속하는 것으로 안심시켰다. 무기도 없는데 어떻게 육식 동물을 저지할 수 있냐, 다수로 몰려오면 어떻게 할 거냐는 둥 재차 물어와 곤란하긴 했지만.
카테고리란 이렇게나 강력하구나!

#13
"그런데 말이야."
도서관 옥상의 자판기에서 이온 음료를 뽑아 건네며 먼저 말을 걸 생각이었다. 이 녀석의 질문은 너무 어렵다! 그런데 그만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네게 내 이름은 뭐야?"
"뭐?"
그러고 보니 그녀는 실은 우주에서 온 외계인이며 지구에 대해 조사 중이라는 엄청난 이야기를 들려줬음에도, 아직 이름은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내 이름을 물어본 거야?"
"아니, 내 이름을 물어본거야."
이녀석의 질문은 정말, 너무 어렵다.

#14
최초의 이름이란 건 타인이 지어주는 것이다. 적어도 일반적으론 그렇다. 처음 세상에 나오게 되었을 때, 혹은 세상에 나오기 이전부터 먼저 세상에 나온 이들이 그의 이름을 지어준다. 나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지어 아는 이는 없다. 바이블에서 크리스트교 신화의 신인 야훼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했으니, 그와 같은 이들은 예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 이 녀석은 내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마치 갓 태어난 것처럼.

#15
"우리들은 각자 이름을 갖고 있고, 정해진 이름으로 불려. 그래서 네 이야기는 이해가 잘 안 돼."
나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괜히 아는 척 하기보단, 이해되지 않는 점.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너희들과 다른 방법으로 생각한다는 점을 이해시키고 싶었다.
"이름이..정해져 있단 말이야?"
"그래. 누구나 같은 이름으로 불러. 별명이라는 것도 있지만."
따져보면 별명은 사람들에 의해 지어진 이름인걸까. 저 친구가 부르는 별명이 있고, 이 친구가 부르는 별명이 있고. 그에 따라 다르게 불리지만 난 그것이 모두 날 지칭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 수가 많아져서, 모든 사람들이 날 다른 방법으로 부른다면 어려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누구나 날 똑같은 생각으로 바라보진 않잖아? 그런데도 똑같이 부르는구나. 어렵다."
"모두가 다르게 부르면 어떤 말이 날 부르는 말인지 알기 어렵잖아.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정해두는게 우리의 관습이야. 물론 친한 사람들끼리는 별명 같은걸 지어서 부르기도 해."
소녀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응,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이름이 겹쳐서 불편한 경우도 있어. 예를들어 난 누구를 에이 라고 부르는데, 나와 목소리가 비슷한 다른 아이가 또 다른 아이를 에이라고 부르는 경우에는 오해를 하곤 해."
"사실 동명이인은 우리도 있는데.."
나는 점점 우리식의 이름 짓는 방법을 변호하는 것에 용기를 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