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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고 그리며/::요즘이야기::

Data _ 진눈깨비

Data _ 진눈깨비

어제 첫눈이 내렸다. 진눈깨비였지만.

소리 없이 소박하게 겨울을 알리고는 흔적 없이 모습을 감추는 진눈깨비. 읽던 책을 덮고 곧 사라질 작은 눈송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득 듣고 싶은 음악이 떠올라 플레이어의 전원을 켰다. 그러나 틀어놓은 음악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가만히 생각에 잠기어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는 것이었다. 창문을 통해 사분히 불어오는 얼음 섞인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살랑살랑 흔든다. 그 틈에 허접한 눈송이 몇몇이 창 안으로 들어와 창틀을 적신다.

아무튼 첫눈이었다. 이런 날에는 무엇이든 평소와는 다른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어린 기대감에 부풀게 된다.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간단히 걸치고서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그러나 밖에 나왔을 땐 이미 눈은 그쳐있었다. 함박눈이 휩쓸고 간 달력사진과는 달리 시커먼 아스팔트가 지저분히 젖어 있을 뿐이었다.

오늘도 진눈깨비가 내렸다. 어제보다 더 많이 와서 쌓였으면 하고 내심 기대를 하지만 역시 곧 그쳐버린 진눈깨비에 질려버렸다. 책장에 앉아서 어제 읽던 책을 마저 읽으려다가 책상이 반년은 치우지 않은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별다른 생각 없이 지저분한 책상을 정리한다. 청소를 하는 와중에 새해 기분을 내기 위해서였다는 이유를 덧붙인다.

낡은 노트 하나를 발견한다. 반년 전쯤부터 쓰지 않았던 옛 일기장이다. 펴봐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인다. 한 편으로는 펴 보기 꺼려지기도 한다. 나중에 한번 읽어보기로 하며 책장에 꽂는다. 그러는 새에 창밖엔 또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다.

모처럼의 휴가였다. 그녀도 물론 휴가는 대환영이다. 재미도 없는 일을 하는 것 보다야 훨씬 났다. 하지만 쉰다고 해도 그다지 할 일은 없었다. 마땅한 취미도 없고 마땅한 특기도 없다. 자기개발이나 공부도 흥미 없다. 지금의 일도 벌이가 꽤 괜찮으니까. 이걸로 되었다. 더 이상 나아갈 필요는 없다.

물론 그녀도 어릴 적엔, 아주 어릴 때에는 꿈꾸던 바도 있었다. 감상적으로 작고 어리석은 사건들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보내기도 했었다. 미래에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 꿈꿔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의미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변에서도 그렇게 말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게 뭔지 생각하라고. 꿈은 나중에 꾸라고. 그러나 결국은 꿈같은 건 없었다. 일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게 뭔지 생각하며 살아 갈 뿐. 그것이 삶이다. 삶에 다른 것은 없다.

창을 통해 반사된 햇살이 눈을 간지럽힌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 까지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점심을 먹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다. 문득 요리를 하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예전에는 과자 같은 것도 스스로 구워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내 귀찮아진다. 식은 밥이 아직 남아있다. 라면을 끓여서 말아먹으면 괜찮을 것 같다.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일기장을 펴 본다. 다소 부끄러울 정도로 감상적인 글들에 대하게 되니 묘한 기분이다. 정말로 이 글들을 내가 썼던가? 게 중에 여행에 대한 글이 있다. 어딜 가 뭘 하고 뭘 보겠다며 시시콜콜히 쓰여 있다.

여행이라는 단어를 보니 문득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무슨 이유로든 종종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하는 법이다. 그렇게 문득 여행의 충동을 느낄 때면 아무 일이나 붙잡고 경비를 마련하여 어디로든 떠나버리는 것 역시도 즐거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아니, 그녀에게 여행을 할 정도의 돈은 있었다. 근 일주일간은 아무런 계획도 없기 때문에 시간의 여유도 있었다.

일본으로 가 볼까? 아니면 중국? 그냥 미국의 섬에 다녀올까? 혹은 국내에 어디 괜찮은 곳 없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다가 아직 정리가 덜 된 책상 위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디로 갈 지도 정하지 못한 그녀는 멍하게 서 있다가 결국 여행을 포기하기로 한다.

TV에서는 평소와 같은 이야기들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다. 누구에게 숨겨진 딸이 있었다. 누구누구가 사귄다. 누가 마약을 했다. 평소에 관심이 없던 이야기들이지만, TV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지켜본다. 그랬구나. 그렇구나. 나중에 기억할 리 없다는 것은 그녀 스스로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저 지켜본다. 그랬구나. 그렇구나.

어느새 해가 저문다. 밖은 또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일주일이 지났다. 다시 일상이 돌아올 터였다.

일어나자마자 특별히 으슬으슬하다고 생각했는데, 창밖을 보니 온통 하얀 것이 눈 천지다. 갑자기 폭설이란다.

흘러가는 버스 안에서 문득 집에 두고 온 낡은 일기장이 읽고 싶어졌다. 다시는 예전처럼 쓰지 못할 거란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분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멍할 뿐. 어차피 다들 그렇게 사는 걸.

푸르스름한 듯 불그스름한 듯 애매한 빛깔의 튀튀한 하늘은 유령처럼 희미한 눈의 무리를 뿌린다. 갈 곳 모르는 어린 눈들은 하릴없이 지나가는 차들의 차창만 두드릴 뿐이다. 그들에게는 목표도 희망도 없다. 그저 멍하게 떠다니며 꿈속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흐르는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그만 울어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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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의 글입니다.
사실 초본이 완성된건 오래되었는데, 좀 더 분량을 늘여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으로 고민을 좀 하느라 늦었습니다.
담백한 가운데 드러내고 싶은건 제대로 묘사하면 느낌이 어떨까 해서 이렇게 써봤는데 어떨런지요.
물론 이야기의 완성도가 낮은 것에 대해서는 사죄를...OTL

하지만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겨울 다가겠다 싶어 그냥 올려봅니다. 다음에 '글을 쓰는 느낌'이 좀 더 돌아오면 한번 더 고쳐쓰기 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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