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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

생명의 의미


요즘 유난히 기운이 없었다. 계속해서 지쳐있었다. 막연히 피곤했다. 수일동안 쉬면서도 피곤했고 무엇을 해도 금방 지쳤다. 아니, 지친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저 멍 - 하게 침대 위에 누워 막연한 생각을 하며 보냈다. 어떤 언어로 구체화 된 생각이 아닌, 표현하기 몽롱한 이미지들을 떠올리며. 어떤 느낌을 계속 떠올리려 하거나 어떤 물체들의 움직임이 계속 떠올랐다. 그것에 집중한 것은 아니고, 그러다가 잠들었다가 깨어나서 또 몽롱한 피곤기를 느끼며 어떤 생각을 하고 다시 잠들고..물론 그런건 기운을 차리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책도 잘 읽지 않고, 음악도 잘 듣지 않고, 어떤 창작활동도 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공부도 하지 않았다. 의미있는 움직임도 없었고, 시간도 흐르지 않았다. 그저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어제였다. 평소와는 달리, 좀더 바람을 맞으며 가고 싶었다. 버스에 탔고, 창문을 열고 멍하니 바람을 맞으며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젠 특별히 생각하는 것도 없었다. 특별한 가사도 없는 반복적인 곡을 틀어 귀를 덮은 채 가만히 바람을 맞으며 돌아오다가 문득 걷고싶어 도중에 내리려 했다.

그때 왠 아주머니께서 내게 말을 걸었다.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버스 안에 있었더라고. 아주머니의 손에는 작은 새 한마리가 있었다.

왜 내게 주냐고 묻자, 착해보인다느니 참해보인다느니 부탁한다며 그냥 내게 건내주었다. 지저분한 흰 목장갑 하나와 함께.

재대로 날지도 못하는것 같은데, 이녀석은 왜 버스안에 있었을까. 햇살이 강하게 내비치자 녀석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손으로 그늘은 만들어줘도 한참을 웅크리고 있다가 살며시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후엔 갑갑해 졌는지 계속 내 손 밖으로 달아나려 했다. 녀석이 너무 덥지 않도록 왼손 오른손으로 번갈아가며 녀석을 잡고 있던가, 혹은 두손을 접시모양으로 만들어 녀석이 그 위에 앉아 있을 수 있도록 이리저리 손모양을 바꾸어 가며 녀석을 집으로 데려왔다.

하필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열쇠도 없었다. 난 녀석을 마당에 내려놓았다. 잠시 엉거주춤하더니만 폴짝 폴짝 뛰어 상추들이 줄지어 있는 소밭 속으로 도망친다. 몸집이 워낙 조그맣다 보니 찾기가 쉽지 않았다. 벌써 밖으로 도망쳐 버린것은 아닐까? 난 눈을 감고 가만히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그렇지. 녀석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병아리의 그것보다는 좀 더 밝고 소박한 울음소리. 아직 이곳에 있구나.

녀석을 다시 발견하여 손 위에 놓을 때엔 좀더 암전했다. 주변에 갈 곳이 없다는걸 깨달은 것일까.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아버지께서 돌아오셨다. 함께 돌아온 동생에게 보여주자 귀엽다며 즐거워했다.


처음엔 작은 새니까 그저 참새려니 했다. 하지만 인터넷에 물어보자 이녀석은 메추리라고 한다. 메추라기라니. 암컷이라면 알도 까먹을 수 있는걸까? 재미있는데! 난 구조한 어린 새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가이드가 있을것이라고 생각하고 더 검색을 해 보았다. 디시인사이드의 '동물-기타'갤러리에 숲속기린이란 분이 쓰신 '[참새] 아기 참새를 구조하였을때.. '라는 게시물. 난 이 게시물이 가이드하는 대로 상자에 임시거처를 만들어 주었다. 마침 큰 상자는 없었기에 작은 상자이긴 했지만..다음날 큰 것으로 갈아줄 생각이었다.

기운이 없어 보이기에 억지로 물을 먹였다. 종이컵을 잘라 소량의 물을 담은 뒤 부리에 대 주었다. 계속 대고있자 그제서야 좀 마신다. 입에 물을 머금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닥에 놓아주었다. 녀석도 새라고, 하늘을 쳐다보며 부리를 열었다 닫았다 뻐끔거린다. 새들이 물을 마시는 장면은 참 재미있다. 그들은 물을 마시기 위해 하늘을 쳐다본다.

두어 차례 물을 먹였다니 기운이 좀 나는 모양이다. 다시 울음소리를 내며 폴짝 폴짝 뛰기 시작했다. 집 안에 휴지조각들을 찢어넣어 푹신하게 만들어 준 뒤 녀석을 임시거처 안에 넣어주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듯 계속 폴짝거린다. 물론, 너 넓은 곳에 풀어주고 싶지만 이 동네는 쥐도 고양이도 많은 동네다. 이 작은 몸집으로 그들과 마주쳤다가는 살아남지 못한다.


아무튼, 계란 노른자도 좀 넣어주고 물도 좀 넣어주고 하루가 지났다. 밤에 녀석이 제잘거리길래 무엇이 문제일까 생각하다 혹시 책상 위가 추운건가 싶어 따듯하게 데워진 바닥 위에 녀석의 집을 올려놓았었다. 그랬더니 조용해진다. 녀석의 요구를 알아들은것 같아 내심 뿌듯했다.

아침에 왠일인지 일찍 일어났다. 녀석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냉큼 달려가 확인해 보았다. 아직 잠든 모양이다. 새근새근. 녀석이 숨쉬는 것이 보인다. 다행이 잠자리가 그렇게 불편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월요일엔 수업이 많은 날이다.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공강은 2시간 정도밖에 없다. 그것도 한번에. 학교로부터 집까지의 시간적 거리는 1시간정도. 그 말은 저녁 7시까지 녀석을 돌볼 수 없다는 말이다.

걱정이 된다. 오늘 아침은 꽤 추운것 같은데..그래도 어제 좀 먹고서 기운을 좀 차린것 같으니 괜찮을까. 아니, 그렇게 많이 먹지도 못했는데. 계란 노른자를 좀 더 먹으면 괜찮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7시 30분에는 학교로 향해야했다.

마지막으로 계란노른자를 좀 더 놓아주고, 물을 더 준뒤에 녀석의 맑은 울음소리를 들으며 집을 나섰다. 괜찮겠지. 오는 길에 좀 더 큰 박스를 구해올까. 주변에 동물병원같은게 있었던가. 평범한 새 모이는 보통 어디에서 팔지?



시간이 흘러 수업이 모두 끝나고, 집을 향해 달리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수업도 즐겁게 들은것 같다. 물리학 수업은 평소보다 더 재미있었고, 더 정리되어 기억된다.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웅얼거리는 화학교수님의 수업도 졸지 않고 다 들어냈다.

그녀석은 오늘 내 대화의 소재가 되었었다. 전에는 쥐랑 싸우더니, 이번엔 새를 주웠다고. 도시에서의 삶을 살면서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동물들과 인연이 많은 편인가 보다라는 식의, 사람들뿐인 일상에 침범하는 작은 생물들이 가져다준 이야기를 즐거워했다.


오늘 12시쯤에 죽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조용하길래 확인해 보았더니 이미 죽어있었다고 한다. 아버지께선 녀석을 나무 밑에 묻어주었다. 녀석을 위해 집이라고 만들어논 상자쪼가리는 이미 버리신 모양이다.

손에 쥐어진 생명을 지키지 못한것..이상한 기분이 든다. 또 메아리치는 이미지들이 머리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는다. 묘한 기분의 이미지. 이번엔 다만 그런 이미지 뿐만은 아니다. 여러 의문의 문장들이 머리속에서 휘몰아친다.

작은 생명. 아니 몸집이 작다고 작은 생명인가. 한 생명의 가치와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은 무엇을 낳는가.

침체하던 나를 일으킨건 이녀석이라고 이미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녀석은 이렇게 쓰러져 묻힌다.

녀석이 나를 위한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내가 어찌 해야 녀석이 살아날까 고민했었다. 무엇이 녀석의 건강에 좋을지 찾아보고, 임시 거처를 어떻게 만들어 줘야 할까 고민했고, 만들었었다. 구체적 고민과 생각을 다시 시작한건 이녀석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건 이녀석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 움직임이 내게 어떤 영향력을 끼쳤다. 다시 생기가 돋고, 다시 무언가 시작할 의욕이 생긴다.

..이 녀석이 내 손에 들어온 이유가 나를 위해서란 말인가? 그럼 내가 한 행동은 누가 한 것인가?

말로 다 설명하기 힘든 생각과 망상과 미묘한 논리의 흐름이 머리속에서 휘몰아친다.


종이 무엇인지 묻기 위해 찍은 저 사진 한장이 녀석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 되었다. 카메라가 어머니의 사무실에 있어 더 화질좋은 사진을 찍어두지 못했다. 사라져가는 생명앞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 만은.


물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알고 있다. 다시 내 삶으로 복귀하는 것. 끊임없이 밀려오던 지침과 피곤함을 거부하고 다시 재대로 살아가는 것.

하지만, 오늘까지만..오늘까지만 좀 쓰러져 있자.

오늘까지만..



내게 하나의 이야기를 전해준 녀석에게, 이름에 '리'자는 넣어주려고 했던 녀석에게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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